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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 what you see

7/2/2025 • Thought

Draw what you see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곳은 남미 에콰도르 키토에 위치한 Alliance Academy International이었다. 그 학교의 미술 선생님은 Mrs. Bond라는 미국인 선생님이었는데, 참 유쾌하고 친근한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독특한 건, 미술 선생님이었는데도 "drawing"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고 "drawling"이라고 발음하곤 했다는 점이다. 본인도 그걸 알고 계셨고, 이야기하며 늘 시원하게 웃으셨다. 나는 그 수업이 편했고, 선생님의 커다란 웃음소리도 좋아했다.

Mrs. Bond의 미술 수업은 학교 건물의 지하에서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짙고 무거운 유화 냄새가 풍겼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 냄새가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그 깊고 진한 분위기는 매력적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선생님이 늘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다.

Draw what you see, not what you think you see.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미술을 특별히 배운 적은 없었지만, 선생님이 말한 대로 그저 눈앞에 보이는 대로 그려보려고 노력하면, 조금 투박하고 어설프더라도 내 나름의 매력이 담긴 그림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보이는 걸 무시하고, 머릿속 이미지에만 의존해서 "이 부분은 이렇게 생겼겠지" 하고 그리기 시작하면 금세 그림이 어색하고 이상해졌다.

나중에 심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이 경험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도, 있는 그대로를 보기보다는 머릿속에 미리 설정된 신념이나 기대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곤 한다.

가령, "지하철은 제시간에 와야만 해", "내 파트너는 당연히 이렇게 행동할 거야", "나는 언제나 행복해야 해", "내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거야", "모든 사람은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해"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신념들은 현실이 어떤 모습인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방식을 알려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내 기대와는 자주 어긋난다. 사람들은 때론 예상 밖의 행동을 하고, 상황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내 안의 신념을 다시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현실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때 머릿속의 이미지에 집착하다가 엉뚱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자주 하려 한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원리』에서 했던 말처럼, 진리를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가능한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신념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점검하고, 보다 확실한 것 위에 내 생각과 행동을 다시 세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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